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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27일 새벽의 그들은-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를 지날 때마다 늘 들었던 의문이 있다. 그날 어둠 속에서 광주를 지키려다 끝내는 망월의 품으로 가신 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왜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내려놓지 않았을까.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은 눈앞에서 쓰러진 이웃들을 마주했다. 어쩌면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 쓰러졌기에 저항했다. 개중에는 길을 가다 부딪쳐 다투거나, 때로는 식당이나 찻집·술집·당구장 등지에서 시비가 붙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게다. 그런 시민들이 눈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얻어터져 피 흘리고, 속옷만 입은 채로 금남로에서 좌우로 굴렀다.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 시내에서 펼쳐졌던 광경이다.
     

    5월 21일 오전 광주 시민들은 정오까지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이날 새벽 광주역 앞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을 앞세워 공권력의 만행을 규탄하면서도 기꺼이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김밥과 빵, 음료수를 나눴다. 하지만 이내 되돌아온 것은 계엄군의 총탄이었고, 뒤이어 군의 저격수들이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금남로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들 중에는 금남로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하던 시민도, 전남대 부근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만삭의 임신부도, 헌혈을 마친 여고생도 있었다. 어떠한 영화보다 더 불행한 장면이 금남로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광주 시내에서 이러한 비극을 목격한 외국인들조차 함께 분노하며 광주 시민들과 손을 맞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민들은 무기를 찾아 나섰다. 구식 무기를 구해 온 시민들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국군’에 맞섰다.


    이날 오후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뒤 외곽 지역을 틀어막았다. 광주는 ‘육지 속의 섬’이 됐고, 광주 외곽 지역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됐다. 광주 외곽을 다니는 사람과 차량을 향해 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군인들은 누가 어떤 목적에서 광주에 드나드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채소를 팔러 온 농민인지, 무서워서 광주를 떠나는 시민인지,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는 시민인지, 마을에 사는 주민인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군이 물러간 광주는 평화와 일상을 되찾았고 전남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검은 리본의 조기가 내걸렸다. 부상자들을 위해 많은 시민들은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다. 병원에 수혈 도구가 없어 헌혈자들을 돌려보낼 정도였다. 쌀을 내오고 거리에 솥단지가 내걸리고 주먹밥이 만들어졌다. 시장이 다시 열리고 시민들은 군의 만행을 규탄했다. 시민들은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를 요구했으나 군에서는 ‘무기 반납’, 다시 말해 ‘무조건 항복’만을 겁박했다. 탱크를 광주 시내까지 진입시키고 헬기를 띄우며 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다.

    군의 무력 진압을 앞둔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남도청 앞에 모였다. 항쟁 지도부는 여성과 중고생,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모두가 두려웠고,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어둠의 끝자락에서 다시는 가족과 친구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이다.

    두렵기로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채 시민들을 상대로 ‘전투’를 앞둔 공수부대 특공대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이들은 ‘상무충정작전’을 앞두고 송정리 비행장의 격납고에서 광주 시내와 전남도청을 비롯한 주요 건물을 숙지하고 도상 훈련을 한 뒤에 ‘전투’를 앞두고서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냈다. 그렇게 모두가 두려워하는 어둠이 깊어 갔다.

    왜, 그날 시민들은 총을 내려놓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난 열흘 간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과 야만, 수많은 희생, 집에 두고 온 가족과 벗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항복’과 ‘저항’의 갈림길에서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군에 맞서며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쓰러진 그들, 끌려간 그들의 죽음과 고통을 딛고 머지않아 밝음이 찾아왔다. 그날 새벽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채 이불 속에서 통곡하던 광주시민들은 곧바로 가동된 분수를 끄라고 항의하며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는 그들의 간절한 마지막 외침을 되살려 냈다. 그렇게 5·18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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