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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향 초대석-‘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임 행진곡’은 오월 영령·민주주의 희생자에 바치는 헌가”

    1980년대 시대정신을 담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세종시문화재단 대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맹-세…”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작곡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4월에 광주에서 탄생한 노래는 한국 민주화 현장을 뛰어넘어 홍콩과 중국, 대만, 미얀마 등 세계 각국에서 불린다. 민주·노동·평화·인권을 상징하는 한 곡의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작곡자인 김종률(64) 세종시문화재단 대표를 만나 창작 과정과 문화예술 경영에 대해 들었다.

    ◇5·18피해자 가장 먼저 위로한 ‘검은 리본 달았지’=“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당신은 하얀 수의 입었지만/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나는 오늘 슬픈 눈물 흘렸지/ 나는 오늘 슬픈 눈물 흘렸지/ 당신은 눈을 감고 떠났지만/ 나는 오늘 슬픈 눈물 흘렸지….”


    1981년 3월 14일 상무관옆 남도예술회관. 대학가요제에서 두 차례나 수상했던 김종률(당시 전남대 상대 4학년)의 두 번째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그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부쳐’란 부제를 단 다섯째 마당에서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맨발로 무대에 올라 자작곡 ‘검은 리본 달았지’를 불렀다. 초청을 받아 공연장을 찾은 5·18 희생자 가족과 부상자·피해자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항쟁 5일째이던 1980년 5월 22일 오전 상무관에서 충격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부처님 오신 날’이던 하루 전날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로 희생당한 시민들의 나무관들이 안치돼 있었다. 그는 너무나 참혹하고 충격적인 광경 앞에서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상무관 밖으로 나오니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검은 리본들이 보였다.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그는 다시 자취집으로 되돌아왔다. ‘한 곡의 노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20대 음악청년의 가슴에는 분노와 슬픔, 자괴감이 가득 찼다.
     

    “그날 날 새면서 만들었던 노래가 ‘검은 리본 달았지’입니다. 지금도 그 노래만 부르면 가슴이 막 뛰고 슬픕니다. 제가 항상 가슴깊이 부르고 싶고, 누구한테든지 들려주고 싶은 노래입니다.”

    정유하 전남대 5·18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지난 2017년 펴낸 ‘그래도 우리는 노래한다-민중가요와 5월운동 이야기’(한울)에서 ‘검은 리본 달았지’에 대해 “가장 서슬이 퍼렇고 무서웠던 시절에 작곡되고 연주되었으며 5·18 민중항쟁의 피해자들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위로했던 노래”라며 “이 공연은 5·18 민주화 운동이후 5월을 주제로 다룬 최초의 저항음악회로 기록됐다”고 평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표지석 제막식에서 황석영(오른쪽) 작가와 김종률 대표(2020년 5월).

    ◇‘전일방송 대학가요제’ 수상 음악성 인정받아=스무 살 시절, 김종률 세종시 문화재단 대표는 노랫말을 직접 쓰면서 곡을 만들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음유(吟遊) 시인’으로 불리는 포크 가수 밥 딜런과 ‘형’으로 호칭하는 김민기가 그의 우상이었다. 1979년 4월에 그는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주최의 ‘제2회 VOC(전일방송) 가요제’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소나기’를 모티브로 한 같은 제목의 노래로 대상을 받았다. 이어 같은 해 8월에 개최된 ‘MBC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촉망받는 가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독집음반을 낼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불과 1년뒤 ‘80년 5월’을 겪으면서 노래와 음악세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소나기’, ‘영랑과 강진’과 같은 서정적인 노래에서 ‘검은 리본 달았지’, ‘님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엄혹한 사회현실을 반영한 노래들로 바뀐 것이다. 앞서 5·18 이전에도 그는 광주일고·전남대 선배인 이훈우(2021년 타계)와 김민기의 조언에 따라 음악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노래라는 것이 뭡니까? 노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 행복을 주는 건데 나는 ‘노래를 통해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야심과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5·18 기간 동안 오롯이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에 있으면서 항쟁을 다 봐왔지 않았습니까? 무섭고, 비겁해서 앞장서지 못하고, 뒤에서 돌이나 던지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저였지만 너무 충격적인 거예요. 나라를 지키라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군인들이 무차별하게 진압을 하고, 결국 시민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이 과정을 보면서 공포와 분노, 소심한 성격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무서운 마음속에 27일 새벽을 맞이하게 된 거죠. 그 과정을 거치면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더라고요. 총칼 앞에서,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때 제가 하는 것(음악)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충격적이어서 ‘노래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담요로 유리창 가리고 노래극 녹음해=‘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 과정은 4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18 2주기를 앞두고 있던 때 황석영 작가가 광주지역 문화예술패들에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뭔가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그해 2월 20일 있었던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노래극으로 만들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1982년 4월 어느날, 광주시 북구 운암동 황석영 작가 자택(현 광주문예회관 국악당과 소극장 사이)에 모인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윤만식, 김선출, 임영희, 임희숙 등 10여명의 공연 팀은 1박2일 작업으로 창작 노래극 ‘넋풀이’를 제작했다.

    황석영 작가가 짠 노래극의 전체적인 틀을 보니 모두 7곡의 창작곡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중 6곡은 기존 만들어둔 노래들로도 노래극 시나리오와 잘 맞았는데 맨 마지막을 장식할 행진곡풍의 곡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는 입에서 맴돌던 첫 한두 마디를 바탕으로 4시간 여 만에 작곡을 했다. 이에 맞춰 황석영 작가가 백기완 선생의 장시(長詩) ‘묏비나리’를 개작해 노랫말을 붙였다. 비장한 마지막 합창 행진곡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곡명이 붙여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맹-세…”

    노래극에 악기로는 기타와 북, 꽹과리, 징 등이 동원됐다. 소리가 주위로 새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유리창을 막았다. 한참 연습을 하고 새벽녘에 소니 카세트테이프에 30여분 길이의 노래극 ‘넋풀이’를 녹음했다. 이후 기독교청년협의회(EYC)에서 복사해 전국 각지로 배포한 테이프 속 ‘님을 위한 행진곡’은 대학가와 노동현장 등 각종 집회에서 불리며 ‘민중의 애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5·18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보수정권 하에서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97년부터 12년 동안 5·18 기념식장에서 ‘제창’됐으나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부터 합창단에 의한 ‘합창’으로 불려졌다. 9년이 흘러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5월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를 ‘존·창·각’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었다는 생각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분노가 솟았어요. 시위대와 노동계에서 불렀다고 해서 이 노래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노래입니다. 좁게는 5·18 영령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노래이고, 우리 광주 시민을 이야기 하지만 더 크게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뤘던 분들을 위한 노래이기도 해요. 아실만한 분들이 자꾸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이 제 삶속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제가 항상 잊지 않으려고 ‘존·찬·각’이라고 하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영령들의 용기에 대한 ‘존경’, 사랑에 대한 ‘찬사’,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이런 역사는 언제든지 또 나올 수 있어요.”

    ◇“문화예술로 승화된 5·18 돼야”=김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전문 음악인의 길대신 종합 광고 대행사를 거쳐 소니뮤직 엔터테인먼트코리아 대표를 맡아 전문 경영인으로 15년을 일했다. 2015년부터 4년간 광주 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님을 위한 행진곡’ 대중화·세계화 사업을 추진했다. 지난 2020년 2월부터 세종시 문화재단 대표이사로서 ‘푸른 세종 2030-예술로 젊은 도시, 문화도시 세종’을 기치로 내걸고 문화예술 인프라 확장과 운용에 온힘을 쏟고 있다. 세종시 문화재단 대표에 취임해서도 ‘푸른 세종’이라는 곡을 작사·작곡해 재단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 대표의 삶을 바꿔놓았다. 노래 한곡의 힘을 다시 믿는다. 더욱이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변함없이 삶을 지탱해 나갈 인생의 지침(指針)이자 지표(指標) 역할을 한다. 또한 ‘이제는 투쟁의 장으로서의 5·18이 아니라 문화예술로 승화된 5·18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5·18에 상처 입었던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뛰었던 분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얻었다면 정말로 저는 행복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랬듯이 항쟁의 역사는 정치 영역이나 교육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정치·교육 영역에 있는 역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로 승화된 역사만이 영속(永續)합니다. 5·18이 광주를 넘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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