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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달의 칼럼 3월호]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는 사회
김옥렬(재단 편집위원장, 다큐디자인 대표)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광주여자고등학교는 일제시대(광주공립고등여학교→광주야마또고등학교) 일본인 여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였고 해방이후(광주공립고등여학교→광주공립여중→광주여고)엔 광주 여성인재 양성의 한축을 담당한 명문학교다. 그 학교 역사를 좀 읽다보니 재밌는 이야기가 나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말 공립고등여학교가 옛 일본 학교 시설 등을 그대로 활용해 문을 연다. 이때 개교 작업을 주도한 이가 박학규 도교육청 학무과 장학관이었는데 그는 장학관 직책이면서 이 학교 교장을 맡고, 수업을 하는 교사 역할까지 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교육청에 출근했다가 학교에 와서 수업하고 학교 업무 보고 오후엔 또 전남으로 출장 가서 새로운 학교 개교업무를 봤단다. 본인 증언인데 인재가 드물었던 먼 옛날의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궁금해진 것은 그가 근무했던 ‘전남도교육청’ 위치다. 위치가 어디였길래 그 시절에 투잡 쓰리잡이 가능했을까? 당시 도교육청은 동구 동명동 143의 14, 지금 광주중앙도서관 자리다. 서석초등학교 옆이고 광주여고까지는 걸어서 2분거리. 의문이 확 풀린다.
그런데 광주중앙도서관 누리집 어디에도, 도서관 주변 어디에도 그 자리가 도교육청 옛터였음을 알리는 안내문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전해간 광주여고 옛 자리에도 ‘여기가 광주여고 터’였음을 알리는, 기관에서 세운 안내판 하나 없다.
구시청사거리 이야기로 가보자. 많은 청년들이 밤이면 구름처럼 모여들어 젊음을 불태우는 이곳 사거리는 지금도 여전히 ‘구시청 사거리’. 현재 시청은 상무지구, 그 전엔 계림동에도 있었고, 그 전에 시청이 있던 자리가 바로 불로동 현 ‘구시청 사거리’ 일대다. 광주가 광주면이던 시절 면사무소가 위치한 곳이고, 1925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첫 광주시 청사가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 세대들은 이곳이 계림동 이전 청사였다는 사실을, 또 상무지구 이전 시청은 계림동이었는지, 불로동인지 알까? 물론 이건 인터넷을 뒤지면 자료가 좀 나오나, 현장을 다니는 이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광주 첫 청사자리’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 여기가 첫 청사자리구나’ 하고 기억하기도 쉽고. 어디에도 이런 걸 알리는 친절한 안내판 하나 안보인다.
하나 더할까? 한때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광주시민이 꽤나 되었을 공간. 수기동 68번지에1988년 문 연 명성예식장이다. 2019년 철거하고 현재는 27층짜리 새 빌딩이 들어서있다. 정말 명성을 날려 시민들이 모르는 이가 없을, 많은 시민의 생애 첫 출발지였을 이곳의 역사는 조용히 허공으로 사라졌다. 명성예식장 입구에는 장전 하남호선생의 수박통 만한 글씨로 ‘눈부시게 푸르른 날, 사랑이여 태양처럼 영원하리’라는 결혼 축하글이 새겨진 2미터가 넘는 대형 돌비가 서 있었다. 지금은 간데 없지만.
새 빌딩이 완공되고 지나면서 그 비는 어딨는지, 또 이곳이 한때 명성 날리던 명성예식장이었는지를 알리는 안내문이라도 하나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다. 민도 관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예는 차고도 넘친다. 몇 번을 쓸만큼 눈물겨운 사연들이 많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렇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기록에 약할까?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을 보유한 나라 후손들인데 말이다. 광주라는 도시가 천년 역사를 가진 고도도 아니고, 문화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라도 잘 다듬고 기록해서 인문학적 자원을 만들어가야 할 일 아닌가? 왜 가진 것도 소중하게 이어가지 못하고 이 모양인가? 그러고도 문화수도니 문화도시니 문화중심도시니 할 이인지?
전주에 가면 콩나물 국밥집만 방문해도 건물 앞에 ‘이 콩나물 국밥집은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고요, 그 전엔 뭐하던 건물이었고요~’라고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도심 곳곳에…. 관에서 이쁘게 제작해 잘 붙여 두어 보기도 좋다. 전라도 말로 사삭스런 짓이라고? 천만에. 그게 역사를 이어가는 거고,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가고, 시민들의 문화소양을 길러주고 자긍심을 높여주는 일이며 찾아오는 고객들을 위하는 친절함이다. 도시의 켜켜이 쌓인 터무늬를 지키고 가꾸는 것이다.
인문학적 마인드가 부족해도 한 참 부족한 광주라는 도시의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