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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원으로 되짚어보는 5·18항쟁(16) 민주세력의 결집과 재무장

    ‘총기 회수’ vs ‘재무장’ 수습대책위 내부 입장 갈려
    정상용·윤상원 등 청년학생들
    ‘총기회수 반대 결사항전’ 주장
    이성학·장두석·박석무 제외
    재야인사 대부분 ‘비폭력’ 고수

    재무장파 조비오 신부 설득으로
    수습위 합류 학생수습위 재구성
    대학생 100명 모집 총기 지급
    계엄군 진공 대비 결사항전 태세

     

    1980년 5월 24일 오후 3시 광주시 금남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살인마 전두환’ 글귀가 적힌 허수아비를 만들어 분수대 위에서 화형식을 하고 있다./(사)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YWCA 항쟁파 지도부 구성과 보성기업 회의

    24일 오후 3시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가 시작되었다. ‘살인마 전두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분수대 위에서 화형식을 하였다. 마침내 24일 오후부터는 이애신 총무께서 광주YWCA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게 되었다. 궐기대회 후 1만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도청 분수대에서 공용터미널, 광주역, 유동삼거리, 금남로5가를 거쳐 다시 도청 앞 분수대까지 돌아오는 가두행진을 했다.

    행진을 끝마치고 오후 7시경 광주YWCA로 돌아오니 신영일, 김정희 등 1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청년학생, 극단 광대, 국민연합 등은 정상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투쟁조직(YWCA팀)을 결성했다.

     

    저녁 9시경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 윤기현, 정해직, 박효선, 김광섭, 안길정, 김효석 등 ‘YWCA 투쟁조직’ 간부들은 모두 김상집이 운전하는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보성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밤샘 토론을 거쳐 ‘총기회수 반대, 결사항전’ 계획을 세웠다.

    윤상원은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사무국장이기 때문에 전체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윤상원이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평소 친하게 지내온 정상용이 전화를 걸어 내일 오전 10시 광주YWCA에서 회의가 있다고 알렸다.

     

    박효선은 극단 광대를 이끌고 분수대 궐기대회를 맡기로 하였으며, 정해직은 상무관 분향소와 사망자·행불자를 파악하여 날마다 벽보에 붙이고 궐기대회에서 보고하도록 하고, 윤기현은 적십자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외부에 알리고 농협에 가서 당장 굶는 사람들에게 양곡을 풀도록 요청하기로 하였다. 정현애는 송백회와 여대생들과 함께 대자보와 궐기대회를 진행하도록 하고, 김상집은 가두방송과 투사회보 배포를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25일 오전 광주YWCA에 모이는 재야민주인사들 회의에서 총기회수 중단과 재무장 결사항전을 관철시켜, 그 회의 결과를 가지고 도청으로 들어가 계엄군의 진공작전에 저항할 수 있도록 수습대책위원회를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또한 기동순찰대를 공수들의 양민 학살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동타격대로 재편해 외곽지역에 공수가 나타날 경우 즉각 출동해 대응할 수 있게 하기로 하였다.

     

     

    조아라

    김성용 신부

    ◇대학생들을 시민군으로 조직하다

    5월 25일 오전 10시 YWCA 2층 소회의실에 재야민주인사들이 모였다. 제헌국회의원 이성학, 변호사 홍남순과 이기홍, 전남대 교수 송기숙과 명노근, 신협 이사 장두석,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총무 이애신, 교사 윤영규, 박석무, 윤광장, 민주헌정동지회 회장 최운용 등 재야인사들이 모였고, 정상용, 윤상원이 참석하여 어젯밤 보성기업에서 정리된 청년학생의 입장을 설명했다.

    정상용은 총기회수를 중단해 달라고 재야인사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회장인 제헌의원 이성학은 젊은이들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윤상원이 회의 전에 미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양서조합 상임이사 장두석, 대동고 박석무 선생도 적극적인 찬성을 표명했으나 대부분 인사들은 반대하였다.

    이성학·장두석·박석무 세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야민주인사들은 총기 회수 입장을 거두지 않았다. 서로 자기 주장만 반복하다가 평행선을 그은 채 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이 나라의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결사항전의 의지는 확고했다.

     

    제헌의원 이성학 장로는 정상용과 윤상원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백주대낮에 맨손으로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네. 이건 학살이야. 전두환이가 김대중 선생님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예비검속하고 통대선거로 대통령이 되려고 하네. 이건 헌정을 유린한 쿠데타야. 자네들이 소신을 가지고 이 나라를 구해야 하네. 절대 항복해서는 안 되네.”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상용과 윤상원은, “네 저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하였다.

    광주YWCA에서 회의가 끝난 후, 재야인사 일부는 오후 2시 남동성당에 다시 모였다. 제헌국회의원 이성학, 변호사 홍남순과 이기홍, 전남대 교수 송기숙과 명노근, 김성용, 조비오 신부, 신협 이사 장두석,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총무 이애신, 전남대사대 학장 오병문, 광주YMCA 이사 김천배, 민주헌정동지회 회장 최운용, 위인백과 청년·학생에서는 이양현, 윤기현, 오재일이 참여하였다.

    조경자(당시 미대 학생). 5월 24일 YWCA에서 80여명의 여학생들을 지휘하며 대자보를 썼다.

    이양현과 윤기현은 다시 어젯밤 회의 내용을 설명하며 총기회수를 중단해 달라고 설득했으나 총기회수 중단만큼은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재야인사들은 ‘비폭력 저항’을 주장했고, 만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쳐들어온다면 직접 몸으로 막겠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조비오 신부의 간곡한 설득으로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조비오 신부는 평소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거나 시민들의 신망을 받는 종교인들이 나서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오후 5시 재야인사들의 수습대책위 참여는 기존 11명의 도청 수습대책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종기 변호사, 명노근 교수, 조비오 신부가 남고, 관변단체나 관의 부탁을 받고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참석자는 김성용·김천배·명노근·송기숙·오병문·위인백·윤상원·이기홍·이성학·이애신·이영생·장기언·장두석·정상용·조봉환·조아라·조철현·허규정·홍남순(가나다순) 이었다. 재야인사들이 합류한 수습대책위는 도청 부지사실에서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성용 신부가 『최규화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첫째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할 것, 둘째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셋째 모든 피해는 정부가 보상할 것, 넷째 어떠한 보복조치도 없을 것이었다.

    윤상원.

    ◇윤상원 정상용 시민군을 조직하다

    25일 12시경 정상용과 윤상원은 YWCA 회의가 끝난 후 남동성당으로 가지 않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윤상원은 21일 밤부터 계속해서 시민군들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많은 시민군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윤상원은 김종배와 허규정도 별도로 만났다. 현재 녹두서점에 모인 사람들이 광주YWCA로 본부를 옮기어 ‘대학생들은 YWCA로 모여라’고 방송하고 있으며, 시민궐기대회가 끝나면 많은 대학생들이 시민군에 합류할 거라고 말했다. 김창길과의 입장 차이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던 김종배와 허규정은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환영했다.

    김상집은 광주YWCA 재야민주인사 회의에서 총기회수 중단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평소와 다름없이 스쿨버스로 가두방송을 하며 ‘대학생은 YWCA로 모여라’고 외쳤다. 궐기대회가 끝나고 오후 6시경이 되자 1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100여 명의 학생에게는 곧바로 총기가 지급됐고 초소에 배치됐다.

    ◇마침내 학생수습위원회를 개편하다

    오후 7시경 윤상원의 안내로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정해직, 윤강옥, 박효선 등이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종배, 허규정과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이미 윤상원이 사전 정지작업을 해놓은 터라 학생수습위원회를 새로운 집행부로 결성하기로 하였다. 밤 9시경 결국 김창길은 자신의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위원장직을 내놓겠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25일 밤 10시 수습위원회가 개편되었다. 본격적인 재무장 결사 항전의 출발점이었다. 위원장: 김종배, 내무 담당 부위원장: 허규정, 외무 담당 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기획위원: 이양현 윤강옥, 홍보부장: 박효선, 민원실장: 정해직, 조사부장: 김준봉, 보급부장: 구성주, 기동타격대장: 윤석루.

     

    그러나 학생수습위원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아 24일 밤 보성기업에서 기획했던 결사항전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재야수습위원회와 행보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항쟁지도부의 계엄군 진입에 대한 ‘재무장’론은 재야인사들의 ‘비폭력’ 원칙에 가로막혔고, 재야인사들은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면 자신들이 앞장서서 온몸으로 막겠다며 도청 안에서 시민군과 함께 잠을 잤다./김상집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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